아몬드 독후감(손원평) - 아몬드를 읽고
손원평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언젠가 한번 꼭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작가는 1979년생이다. 소설보다는 영화 쪽으로 꽤 캐리어가 있는 듯 보이낟. 2016년 이 소설로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타며 등단했다.
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단순한 평론가나 독자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소설에 대해 감상하는 게, 그 후기를 소탈하고 솔직하게 적는 모든 일이 힘겹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은자'로서의 후기를 남긴다.
어느 정도 이 책을 읽은 다음 느낀 것은 역시 여성 작가가 소년의 입을 빌려 서사를 전개해서는 안 딘다는 것이다. 물론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같은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편이기는 하지만,그래도 글쎄 뭐랄까.. 글쓰며 자라온 여성이 필연적으로 접하지 못하는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그들만의 특유한 자기검열 같은 게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하여간 그러한 류의 어떤 장벽 같은 게 작동한다. 욕에서도 그렇고, 클라이막스의 연출에서도 그렇고, 내가 두 명의 작가만 놓고 일반화하면 안 되겠지. 그렇다면 그냥 이 작품과 작가에게로 한정하여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좋은 작가도, 그렇게 좋은 작품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영화 커리어가 있길래 비유하자면, 싸구려 3류 한국 영화를 본 기분이다. 그냥 이런 장면이 꼭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삽입한 것들의 집합이라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어찌 본다면 연출이나 형식이나 문장의 측면에서는 세련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곁지식을 많이 끌어오기도 했고, 독자들을 이야기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행작업으로 이전의 이야기를 해주는 부분도 친절했으며, 질척거리지 않고 문장도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연습과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독자들에 대한 배려도 따스한 편이다. 작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라든지, 에리히 프롬을 끌어들임으로써 어쩌면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책이라고 척이라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작품의 요소나 형식적 측면을 가지고 지적하지는 않으려 한다.
하지만 철학적 메시지의 측면에서 결국 이 작품은 용두사미가 됐다. 혹은 어찌보면 아직 말을 다 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다수가 주지하듯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공감 능력]의 소중함을 알자, 혹은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자 정도가 될 것 같다.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작가는 엄청난 공을 들였다. 일단 주인공으로 하여금 일종의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조건을 설정했다. 주인공의 상태에 대한 묘사로 실로 사이코 패스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공감 능력의 부재. 법과 도덕을 신경쓰지 않는 것도 사이코 패스의 특징이지만 엄마와 할멈의 지극한 노력으로 그러한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주인공은 사회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공감능력의 모자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근데 사실 이러한 설정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빈틈도 많이 거슬리는 게 사실이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단순히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을 못하는 정도라고 한다면, 가족들의 참변에 대해서까지 무덤덤할 수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작품 속에서는 그러한 두 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장치를 설치하고 그것을 끝까지 일관되게 끌고 나가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역시 가장 심각한 것은 도대체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헤아려보자면 결국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의 중요성을 조명하다.> 정도가 될 수 있ㅇㄹ 것 같다. 근데 이게 참 처음에 제시했던 것과 마지막에 맺어지는 메시지 사이에 적잖은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초반에 다루어지는 공감의 문제는 깊이가 제법 깊다. 이는 근본적 차원에서의 소통을 이루기 위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문제다. 반면 말미에서 억지로 우려내는 교훈으로서의 공감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즉 철학적 차원에서의 인간에 대한 곰니에서 시작해서 결국 마지막에는 일종의 이타심으로서의 관심을 우리사회 구성원들에게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야기는 균형과 깊이를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