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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정교회와 서방 라틴 교회가 분열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배경: 동유럽과 서유럽의 이질화
동서방 교회가 형식적으로 분열되기에 앞서서 동유럽과 서유럽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점차 이질적인 지역이 되어갔다.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기 전부터 제국은 이미 문화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 언어 차이
로마인들이 사용한 라인어는 제국의 유일한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랜 문화적 전통의 높은 장벽에 부딪혀 로마화가 좌절된 동부 지중해 세계는 여전히 그리스 어와 그리스 문화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문명화가 덜 진행되었고 로마 제국에 편입된 이후 로마화가 크게 진척된 서부 지중해 세계에서는 라틴어가 공식어는 물론 일반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통용어로서의 지위도 갖게 되었다. 청므엔 적어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제국의 어느 곳에서나 라틴어와 그리스어 모두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언어의 장벽이 양쪽을 갈라놓았다. - 지정학적 단절1: 천도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이러한 이질화 과정을 촉진시켰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족의 왕국들이 서유럽에 등장하면서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은 차츰 서방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갔다. 게다가 6세기 말 이후 아바르 족과 슬라브 족이 발칸 반도로 진출하고 이슬람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동서유럽 사이의 활발한 교류와 접촉은 한층 더 힘들어졌다. - 지정학적 단절2
4세기 이래로 지중해 주변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본래 다섯 개의 도시(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와 이 도잇에 거주하는 총대주교들이 교회 조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7세기에 이슬람 군대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석권하여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 세계로 편입된 이후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이 서양 기독교 세계의 양대 중심지로서 실제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로마의 차별적 우위와 새로운 로마로서의 콘스탄티노플
로마는 일찍부터 다른 도시들에 대한 우위를 화곱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로마가 제국의 가장 오래된 수도라는 점 이외에도 로마의 주교는 서방의 유일한 총대주교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내세울 수 있엇기 때문이다. 차후 교황이라고 불리게 될 로마 주교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둘러싼 복잡한 논쟁에서 다른 총대주교들과는 달리 일관되게 확고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한편,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으로 확립했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로마 다음가는 특권을 인정받게 된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이자 황제가 거처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서 동방의 기독교 세계에서 기존의 중심지였떤 알렉산드리아를 제치고 자신의 위상을 점차 강화해 나갔다.
서방과 동방의 갈등 본격화
1.성화상 문제
- 비잔티움 제국 황제 레오3세는 성화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726년에는 제국에 있는 모든 성화상을 철거하라는 칙령을 내림.
- 성화상을 하느님을 표현하고 경험하고 교육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간주해 온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수도사들은 성화상 금지령에 저항함. 성화상 옹호론자들은 특히 성육신 교리에 근거하여 물질적 몸을 취하신 하느님은 물질적 상징들로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고 제국 내 성화상들을 파괴해 나감.
-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 종교 문제에 대한 황제의 개입이 부당하다고 보고 성화상 파괴 정책을 공식적으로 반대하면서 이를 정죄하기까지 함.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면할 수는 있을 지언정 멀리 떨어져 있는 교황을 축출하지는 못함.
- 이때 마침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위협했고, 교황은 프랑크 왕국과 제휴를 맺어, 프랑크 국왕 피핀 3세의 도움을 받아 롬바르드 족을 물리침. 프랑크 국왕은 라벤나를 포함한 중부 이탈리아의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했고, 이것이 1870년가지 계속될 교황령(Papal States)의 시초임.
- 843년 여제 테오도라가 최종적으로 성화상을 허용했지만, 이미 서방 교회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관계는 크게 멀어졌고 양측은 점차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됨.
2.신학적 문제(필리오케)
- 필리오케는 '그리고 아들(썽자)로부터'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단어임.
- 서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고 주장함.
- 동방 교회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대로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함.
- 불가리아에 기독교를 선교하는 과정에 충돌이 발생함.
- 교황이 불가리아에 파견한 독일 성직자들은 동방 정교회의 여러 관행들을 비판하면서 특히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를 추가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음.
- 이게 맞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포티우스는 867년 필리오케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함과 동시에 교황 니콜라우스를 '주님의 포도밭을 파괴한 자'로 몰아 파문시킴.
- 불가리아는 독일 성직자들을 추방했고, 불가리아는 완전히 동방 정교회의 일원이 됨.
서방과 동방의 갈등 노골화
- 동서방의 교회의 불화는 11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마침내 양측이 서로 상대방을 정죄하면서 완전히 갈라서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됨.
- 본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 지역을 노르만 족이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동방 정교회에 서방의 관행을 강요한 것이 문제가 됨.
- 이에 맞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케룰라리우스는 그리스 식 관습을 거부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서방 라틴 교회들의 문을 닫고 사제들을 추방함.
- 교황 레오 9세는 동서방 교회의 서로 다른 관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기경 훔베르트가 이끄는 ㅅ자ㅓㄹ단을 파견함.하지만 총대주교와 추기경 모두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회담은 곧 결렬됨.
- 훔베르트는 총대주교를 이단으로 파문하고 비잔티움인들이 필리오케를 생략한 것을 저주하는 파문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내걸고나서 콘스탄티노플을 떠남.
-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 역시 교황의 사절단을 똑같이 파문함.
서방과 동방의 대중적 갈등으로 심화: 십자군 전쟁
*십자군은 셀주크 튀르크가 세력을 확장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해 오자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서방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1095년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성전을 호소함으로써 결성되었다. 십자군의 1차 동방 원정은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기독교 국왕을 옹립함으로써 처음에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187년 이슬람 측은 예루살렘을 재탈환했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유럽의 군주들은 다시 한 번 대규모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정복할 수는 없었다.
- 여덟 차례나 진행된 십자군 전쟁은 성전이라는 미명하게 여러 가지 참혹한 결과를 가져옴. 그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웠던 것은 제4차 십자군이었음.
-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조직한 4차 십자군은 성지 회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도외시한 채,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약탈함으로써 십자군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행위를 저지름.
- 당시 십자군의 1차 집결지인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성지 회복보다는 상업적 이익에 관심이 많았음. 그리고 ㅅ비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엄청난 뱃삯을 지불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이었음.
- 이 시점에서 때마침 비잔티움 제국에서 제위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고, 폐위당한 황제 층 진영에서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 위해 십자군에 군사 원조를 요청함.
- 베네치아 인들과 십자군은 교황의 계획에 따라 성지로 향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함. 1204년 4월, 베네치아 인들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사흘 동안 도시를 마음껏 약탈함.
- 비록 나중에 비잔티움인들이 다시 수도를 되찾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끔찍했던 사건을 결코 잊지 않았고, 이는 동서방 교회가 다시 연합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함.
서방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분열 고착
- 프랑스 리옹 공의회
동방 정교회 대표들은 필리오케를 인정하는 등 교황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임으로써 동서방 교회의 연합을 실현시키는 듯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불가리아와 다른 동방 정교회 국가들의 반발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서방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비잔티움 교회의 대다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 의해 완강하게 거부되었다. - 피렌체 공의회
오스만 튀르크의 계속되는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서방 교회와 연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됨.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비롯한 동방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필리오케와 연옥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라틴 교회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비잔티움의 대다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이후 동서방 교회의 교류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고, 이제 이슬람의 세력권 안에 편입된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여 동방 정교회의 새로운 중심이자 '제3의 로마'로 러시아의 모스크바가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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