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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교육

4.러시아 정교회와 '제3의 로마'(중세, 근대 초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

by 통합메일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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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1세

키예프 루스 류리크 왕조 의 제5대 대공으로 정복군주 스뱌토슬라프 1세 의 3남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볼로디

namu.wiki

분열되어 있었던 루스 공국들은 1223년 몽골 제국이 숙적인 쿠만을 침공하자 쿠만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 파악하고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불세출의 명장 우량카이 수부타이에게 대패한다. 이번 침공은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호라즘 왕조 잔당을 처리하고 지나가다가 건드려본 정도였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기고도 그냥 돌아갔지만, 시간이 흘러 1237년에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본격적으로 루스를 침공한다. 바투는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 동쪽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박살내며 키예프로 진격했다. 당시 키예프 대공이었던 미하일 2세는 헝가리에 있었는데 그 사이 갈리치아의 다닐에게 키예프가 점령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군사 지도자 드미트로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했다. 결국 치열한 공성전 끝에 성벽은 무너지고 키예프 루스는 처참하게 멸망했다(1240년).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의 척박한 삼림 지대나, 반대편인 러시아 남부의 스텝으로 대거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빛나는 문화도 쇠락하고 키예프 루스의 영토 대부분이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렸다. 몽골인들은 고향과 환경이 비슷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직할통치했고, 삼림지대에 있는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등 루스 북부 쪽은 지구 반대편 한반도의 고려처럼 간접통치를 시행했다. 결국 몽골의 지배는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금씩 힘을 길러 몽골을 쫓아낼 때까지 계속된다. 1326년에는 루스 세계 전체의 정교회를 관할하는 키예프 부주교좌도 전쟁과 몽골의 직접지배로 쇠퇴한 우크라이나를 떠나, 힘을 기르고 있던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키예프 대공 직위는 명목상으로 킵차크 카간 밑 루스 공국을 대표하는 작위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를 점령하자 리투아니아대공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가 소멸했다.
- 나무위키 -
  1. 러시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키예프 공국의 통치자 블라디미르 1세가 998년 신하들과 함꼐 동방 정교회로 개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2. 이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유대 강화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1237년 키예프 공국은 몽골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4. 1325~26년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옮겨 감으로써 모스크바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5. 1439년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러시아인들은 비잔티움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완전히 독립적인 자치 교회가 되었다.
  6.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세가 1472년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모스크바를 '제2의 로마'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계승자로 여기는 생각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모스크바를 동방 정교회의 전통을 지킨 '제3의 로마'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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