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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선량한 차별주의자-4장.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by 통합메일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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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으로 놀리는 게 웃겨?>

흑인 분장은 개그가 될 수 있을까?

(이 사건으로 네티즌들과 샘 오취리 사이에 논쟁이 있던 것 같은데 그 이후 그는 어떻게 됐을까?)

샘 오취리

 

(예전에도 우리 사회의 주된 개그코드 중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그런 개그가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아예 그런 개그가 사라지는 게 옳겠지만, 그래도 그런 개그에 동의하지 않고 웃지 않는 이들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희망을 목격할 수 있겠지.)


<당신이 웃는 이유>

유머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우월성 이론이라고 한다.

 

우월성 이론에 따르면 자신의 위치에 따라 같은 장면이 웃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내가 우월해지는 장면이라면 웃기지만, 반대로 내가 깎아내려진다면 웃기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모든 유머가 우월성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웃음은 이 부끄러운 내면에서 나오낟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다. 어떤 집단을 희화하는 유머는 이런 집단 심리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왜 웃긴가?라는 질문은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흑인 분장을 보고 웃는 사람은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인가? 웃지 않는 사람ㄷ르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가?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이라 부른다.

 

유머가 금기된 영역의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

 

최근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인 형오표현은 약자들을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이런 놀이의 잔혹성은 특히 그 표현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간극 사이에 존재한다.

(말하는 사람은 비록 비하할 의도가 없었고 그저 웃겨보려고 했을 뿐이라지만 그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로 남게 되는 간극이라는 것)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호명 권력>

(생각해보니 옛날 같이 어울리던 놈 중에는 친구를 부를 때 "야 이 병신아"라고 하는 놈도 있었다. 겨우겨우 간신히 손절했다.)

 

테러리스트나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합의가 있는 집단에 대해서는 이들을 비하하는 유머로 인해 잠재된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크지 않았다. 반면 무슬림, 게이, 여성과 같이 사회적으로 긍정적 태도와 부정적 태도가 혼재된 집단에 관해서는 이들을 비하하는 유머를 보았을 때 억눌렸던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컸다.

 

똑같은 비하성 유머라고 해도 그 영향은 "모든 집단이 똑같이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범람하는 혐오표현을 통해 편견은 더욱 자유롭게 소통되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규범을 형성하고 있따. 이런 현상을 평등에 관한 규범이 모호한 현실과 관련 있다.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확립된 규범이 없는 상태에 기생하는 유머들인 것이다. 차별금지의 규범이 사회적으로 확립되기 전까지 유머를 통해 누군가를 비하하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 표출되고 증폭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비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어를 순화하더라도) 장애인, 다문화 등의 용어가 다시 낙인을 담은 비하성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꾸어도 그 대상을 비하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어떤 소수자 집단은 낙인이 부착된 단어를 그들 스스로 전유해버리기도 한다. 아예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단어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퀴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탕니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서슴없이 '병신아'를 외치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아무런 동의없이 그런 말은 받아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은근슬쩍 제시됨으로써 대상을 잠식한다. 그는 언어와 호칭이 만들어내는 구너력의 원리를 일찌감치 깨닫고 간파했던 것이다.)


 

<반응 없는 반응>

유머와 놀이를 가장한 비하성 표현들은 그렇게 '가볍게 만드는 성질'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런 언어 공격은 인간 내면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반면, 그 말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설명할 기회의 순간은 짧다. 우리는 대개 말문이 막힌 채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친다.

 

다시는 그런 말에 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문제제기를 할 만큼 순발력이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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