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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선량한 차별주의자-8장.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

by 통합메일 2021.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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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라는 것>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모두의 권리이다. 하지만 이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각은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입장이 바뀌면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격렬한 시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룩한 역사와 별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의 집회와 시위를 공공질서에 해로운 행위라고 본다.

 

헌법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보장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한정하지만 말이다.

 

개인의 기본적 권리가 공공질서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는 이 한마디는 상황에 따라 때로 강력한 효과를 가진다. 극단적으로는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자의 모든 권리를 부정하고 활동을 억압하는 손쉬운 한마디가 될 수 있다.(중략) 다수가 동의하는 질서가 공공질서이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소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만능 논리가 탄생한다.

 

<법이 부당할 수 있다는 의심>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은 시민의 의무일까? 대체로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당한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도 시민의 책무이기 때문이다.(시민불복종)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

권위에 순응하는 경향은 현재의 법과 질서를 고수하려는 경향과 연결된다.

 

권위에 순응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인식"라고 "타인의 동기를 의심하며 이질적인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변화를 반대하게 된다.

 

역사적 전승으로서 오늘의 헌법이념에 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서 타파의 대상으로 선언한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을지언정 헌법 제9조가 '계승/발전'시키라고 한 전통문화에는 해당하지 않는다.(호주제 위헌에 대한 헌재 판결)

 

동성결혼에 대한 요구는 동성동본결혼과 마찬가지로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사회가 인정할 것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더욱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힘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변화의 시나리오>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잘못 알려진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헌법재판소가 삭제를 요청하면서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004년 당시 요규인적자원부에 제출한 의견에서 헌법재판소는 "오늘날의 헌법체계에서는 준법이란 정당한 법, 정당한 법집행을 전제로 한다."라고 밝혔다.(법집행이 정당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무조건적인 법준수가 요구될 수는 없다는 것)

 

지금까지 헌법재판소가 많은 결정을 통해서 밝혔듯,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런데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법도 때로는 부당하다. 부당한 법은 비민주적인 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선거와 입법 등의 절차는 대개 다수결의 원칙을 택하는데, 이 의결 방식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려지는 결정이 소수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소수자가 정치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고립되어 있다면 그럴 위험이 크다.

 

당연하게도, 다수의 결정으로 소수에 대한 부정의가 용납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렇지 않은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규칙은 민주주의 원리에 반한다. 오늘날 헌법재판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다수에 의해 만들어진 부당한 법을 헌법상 기본권에 비추어 심판하고 폐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고 복종하는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복종은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시민은 단순히 통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다음 롤스의 말처럼 때때로 시민불복종이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는 방도가 된다.

 

사실상 시민불복종(그리고 또한 양심적 거부)은 비록 그 정의로 봐서 불법적인 것이긴 하나 입헌체제를 안정시키는 방도이다. 자유로운 정규 선거 및 (반드시 성문법이 아니더라도) 헌법을 해석할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사법부와 더불어 적절한 제한조건과 건실한 판단을 통해서 이용되는 시민 불복종은 정의로운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를 말한다.

 

시민 불복종은 일종의 '말 걸기' 행위다.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걸기다. 사안의 긴급함과 중요성이 주목받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할 때, 그래서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 효과적으로 의견이 전달되지 않을 때 시민불복종이 사용된다.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효과가 없고, 소수자의 의제에 다수자가 무관심하거나 변화으 의지가 없을 때 불복종의 방식으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사안에 대해 알리는 것이다.

 

(롤스)"만일 정당한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그 책임은 항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대가 정당화되게끔 권위와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에게 있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다.>

(공정세계 가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문제는 부정의한 상황을 보고도 이 가설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명정대하다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그러니 세상이 공정핟고 믿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세상이 부정의하다고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노르웨이 사회복지사 캐더린씨는 "시위하러 올라온 사람들에게 몇 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줬어야 했다"며 주최 측을 비판했다.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판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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