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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선량한 차별주의자-7장. "내 눈에는 안 보였으면 좋겠어."

by 통합메일 2021.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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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자리>

말하자면 장소가 틀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장이나 공원이나 거리는 '퀴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퀴어의 자리는 어디인가?

 

<공공 공간에 입장할 자격>

아고라는 '불평등한 자'의 존재를 조건으로 한 평등의 장소였다. 한나 아렌트는 아고라에서의 정치적 평등이 사적 영역에서의 엄격한 위계와 지배를 전제로 했다고 말한다. 가장이 아고라에서 누리는 자유를 위해 사적 영역인 가정은 희생되어야 했다.

 

성별, 장애, 나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국적, 출신 민족 등 개인의 특성들은 아고라에 입장하기 위한 기표로 작동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 기표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된다. 누군가는 그 기표 때문에 입장을 거절당한다. 그리고 사적 영역에 남도록 돌려보내진다.(지난 대선에서 광장에 대한 문재인의 인식이 생각난다. 호불호가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광장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문재인도 아고라를 언급했다.)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우선 아예 없는 경우다. 아예 없는 이유 역시 여러가지일 수 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도록 했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했거나, 쫓아냈거나, 극단적으로는 죽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제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입장할 자격 없이 공공의 공간에 침범한 사람,거리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교화시킨다. 이런 시선의 익명성과 편재성 때문에, '낯선 존재'인 소수자들이 느끼는 일상의 시선 혹은 '감시'의 압박은 삶을 만성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소수자가 숨어있기로 결정한다.

 

낙인을 피하기 위해 사회가 '정상' 또는 '주류'로 여기는 정체성으로 보이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이를 어빙 고프먼은 패싱이라고 부른다.(일반인 코스프레)(나는 왜 여기서 대학생 때의 남학우 신고식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공적인 장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차별이 사적인 개인의 특성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왜 사적 특성을 공적 영역에서 드러내느냐?"라는 질문은 적반하장에 가깝다. 실제로는 특정한 사적 특성만을 받아들이고(예로 남성, 성인, 이성애자), 특정한 사적 특성은 그 이유로 거부하기 때문이다.(예로 여성, 아동, 동성애자)(철저한 취사선택이라는 거군. 공정하지 않다는 거지)

 

생각해보면 "왜 굳이 공공장소냐?"라는 질문 속에는 상대의 사적 특성을 공공장소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보이지 않는 성소수자에게 축제와 커밍아웃은, 보이는 존재로서 평등한 세계에 입장하고 민주적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낙인이 찍혀 있는 사적 기표를 공공의 장에 노출하는 행위다.

 

<싫어할 수 있는 권력>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싫어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누구나 어디서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있는 자리와 나의 위치에 따라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은 잘 쓰이면 매우 의미있다. 권력자를 향해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민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이 단순한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사회규범에 투하한 일종의 자본이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투자한 결과는 좋지 않다.

 

이를 증오범죄, 다른 말로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라고 한다.

 

'피해자가 공공의 공간으로 나오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피해에 취약한 집단, 즉 소수자에게 범죄의 원인과 책임을 돌리는 전형적인 화법이다. 그래서 소수자가 공공의 공간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식의 처방을 내린다. 범죄를 의도하는 사람들의 바람대로 국가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만일 다수가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소수자 집단이(유럽인권)협약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협약에 담긴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소수자 집단의 종교의 자유나 표현과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협약이 요구하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저 이론에 지나지 않는 권리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지위의 남용을 피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유럽 인권재판소의 판결문의 일부)

 

<영토의 윤리>

사람들에게는 각자 정의가 미치는 범위, 즉 정의의 범위가 있다.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미치는 영역은 한계썬이 있다.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적으로 생각되거나 비인간화되고 잔인하게 대해도 된다고 느낀다. 이들은 정의가 관장하는 도덕적 세계 밖에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도덕적 가치, 규칙, 공정성이 적용되지 않는 외부세계에 존재한다고 인식할 때 도덕적 배제가 일어난다."

 

이 심리적 작용을 통해 사람들은 불평등의 상황을 평등하다고 여기는 모순에 빠진다. 그리스의 폴리스처럼 누군가를 배제한 상태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노예라는 지위는 그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 없이 노동의 필요만이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그 땅의 '주인'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노예'가 된다. 이런 '현대판 노예'는 우리 주변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노예는 이미 사라진 옛날 일이라고 여겨도 될까?

 

고용허가제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직종에 고용주가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제도이다. 이주노동자는 원칙적으로 3년만 일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고용주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여 일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는 마음대로 고용주를 떠날 수 없다. 법령이 정한 몇가지 사정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직장 변경이 허락된다. 하지만 그나마도 고용주가 근로계약을 해지하거나, 직장이 휴업/폐업하거나 고용주가 부당처우를 하는 등 고용주 편에서 고용을 계속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이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일할 권리를 주는 제도라기보다 주인이 외국에서 노동력을 들여로 권한을 주는 제도이다. 이주노동자는 자신을 채용한 주인에게 전속되고, 마음대로 주인을 떠나지도 못한다. 한국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는지 결정하는 권한도 주인이 가진다.

 

한 영토 안에 서로 다른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집단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체계를 흔히 신분사회 혹은 계급 제도라고 부른다.

 

이주 노동자가 과거의 노예처럼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존재하는 한, 사회는 불평등한 신분구조를 눈으로 보고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마이클 왈저는 영토 안에 권리가 적거나 없는 계층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에 반하는 "폭정"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기본 전제로 그 안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관계를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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