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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선량한 차별주의자-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by 통합메일 202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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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딱지와 얼룩>
(학벌 논쟁)

이런 대화는 매우 불편하다. 대학서열화라는, 모두가 알지만 꺼내어 말하기 어려운 일종의 금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심해서 말해도, 마음을 드러내어 솔직하게 말하는 순간 상처를 입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이 질서를 바꿀 생각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감수하라"고 말한다. 왜일까?

<생각이 현실이 된다>
사람들은 특정 대학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성적에 따라 지원 가능한 학교와 학과를 순서대로 나열한 이 배치표의 순서를 통해 대학의 서열을 익힌다.

대체로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임금 프리미엄"이 존재한다.

사실은 그 '간판'이 실제로 개인의 능력도 만들고 기회도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된다는 말인지 생각해보자.

고정관념은 부정적인 영향도 미치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위 명문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은 단지 그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고정관념을 얻는다. 일종의 유리한 편견인데, 이것이 실제로 현실을 만든다. 일상적인 만남이나 각종 사회활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가고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명문대학의 학생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성장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순환 고리 속에서 편견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다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면서 그 집단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흡수되고 이 고정관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고약한 악순환의 고리다. 부정적 고정관념을 자극하면,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부담 때문에 수행능력이 낮아져서,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런 압박 상황을 고정관념 압박이라고 한다.

<차별을 선택하는 사람들>
2018년 교육통계자료에 의하면, 전체 대학생 가운데 여학생의 비율은 44.4퍼센트로 여성의 숫자가 더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반에 가깝다. 하지만 학과별로 보면 상황은 매우 다르다.

차이가 있다면, 많은 여학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공계열 진학에 필요한 수학 '가'형에 아예 응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그 배경에는 사회문화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성차별적 문가가 강한 국가에서 여학생의 수학 성적이 더 낮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성이 다수인 직종의 임금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하지만 그런 직종의 특징은 많은 힘을 필요로 하거나, 다칠 위험이 적다는 특징이 있지 않은가? 그런 그 직종의 특징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실제로 심각한 수준이다.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의 '전택'이 과연 사회적 차별과 무관할 수 있을까?

여성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추어 행동한다.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 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에서, '손성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커버링'이라는 말을 통해 그는, 소수자로서 완전한 주류가 되지 못하면서도 동화주의적으로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삶의 압박을 이야기한다.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고정관념과 편견이 없는 사회에서 자랐어도 우리의 관심과 적성이 정말 현재와 같았을까?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1947년 케네스 클라크와 메이미 클라크의 인형 실험은 편견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면화되면 효과를 안타까울 정도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흑인 아동들 대다수가 백인 인형을 선호했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의 학교를 분리했던 정책을 철폐한다. 그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시설, 똑같은 교과과정, 똑같은 질의 교사가 확보된다면 흑인 아동과 백인 아동을 분리해서 교육해도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 자체는 차별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이미 분리 자체가 흑인 아동의 마음 속에 열등감을 심어주고 있었고, 그 열등감 때문에 교육의 성취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인종에 따라 분리하는 정책은 대개 흑인 집단의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때문에 법에 의해 그렇게 했을 때 영향은 더욱 크다. 우리는 공교육에서 "분리하지만 평등"의 원칙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결정한다. 분리된 학교 시설은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교육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본질적인 기능이 왜곡되어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을,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주는 체제가 되었다. 대학서열이 공정한 경쟁의 결과라고 믿으며 이 모순을 애써 외면하기에는 "딱지"와 "얼룩"이 너무 크다.

메릴린 프라이는 억압의 상태를 새장에 비유한다.

새장에서 뒤로 물어서서 바라보아야만 그 철망들이 모여 새장을 이루고 있으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인식하기 어렵다.

우리의 생각이 시야에 갇힌다.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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