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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 2장 우리는 한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by 통합메일 2021.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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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우리는 한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약자와 약자, 연대의 실패>
(제주 예멘 난민에 대해서 우리나라 남성에 비해 여성이 더 많이 반대했다.)

사람들이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성범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이 공포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제주도에 온 예멘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난민'보다는 '남성'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수식어가 붙었다. 이슬람이란 종교를 가진 무슬림 남성. 많은 여성들이 무슬림이란 단어로 연상하는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과 그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의 구도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 구도에서 여성은 여전히 피해자고 약자였다. 난민 수용 반대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한 요구였따.(정당하다기보다는 합리적인 요구라고 하는 게 맞겠지.)

국민들의 반대는 정부를 움직였고, 2018년 6월 1일부터 예멘인은 더이상 제주도에 무비자 입국을 할 수 없게 되었다.(난민과 비교하면 여성들도 특권을 향유하는 계층이다.)

여성이 주류 집단이라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다.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단순한 방식>
인간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범주로 구분하는 습관이 있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류하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범주를 만들고 그 범주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고든 올포트는 저서 [편견의 본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범주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할 수 있다. 그래야 질서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피아제 식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도식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77억명의 인구를 이런 도식을 가지고 분류할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은 인간을 범주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이런 식으로 단순화된 정보를 스테레오타입, 또는 고정관념이라고 부른다.

1922년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먼이 그의 책 [여론]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의미를 갖게 되었따. 리프먼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각인된 그림을 가지고 경험하지 않은 세상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바깥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폭은 좁다. 그런데 스테레오타입은 효율적으로 무언가 안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여론을 형성한다. 문제는 이렇게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일부 특징을 과잉 일반화한 결과, 즉 편견이다.

고정관념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그 고정관념을 점점 더 확신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반면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정관념의 확증편향)

한나가 고소득층이라고 알고 있는 집단이 저소득층이라고 알고 있는 집단보다 한나의 능력을 더 높게 평가했다. 고정관념이 작동하면서 정보처리를 교란시켰다.

<움직이는 경계>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19명의 외국인이 대한민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귀화했다.

현호는 한국에서 10년을 함께 살았지만 올림픽 출전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던 국적은 커녕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체류 자격도 얻지 못했다.

학자들은 이 경계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헨리 타지펠과 연구자들은 실험을 통해 이 경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임의의 기준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였다.


데이비드 데스테노와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난데없는 편견"이 자동으로 생성되었다고 표현했다.

만일 두 집단이 경쟁관계면 어떤 일이 생길까? 서로 다를 게 없는 집단이라도 상황에 따라 극도의 집단갈등이 초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라인홀드 니부어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국적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보는지 주관적인 관념에 달려 있다.

인간을 여러 차원의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만큼 집단도 거의 무한대로 생성될 수 있다. 당연히도 한 개인은 동시에 여러 차원의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차별을 받는 집단에 속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특권을 누리는 집단에 속하기도 한다. 때로는, 차별을 받는 여러 집단에 속해 있어서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차별받기도 한다.

<교차로에서 일어나는 일>
사회가 흑인을 말하면 남성을 떠올리고 여성을 말하면서 백인을 떠올린다면, 흑인 여성은 사실상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상황을 보고 킴벌리 크렌쇼는 교차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흑인 여성들의 사례처럼 차별을 단면적으로 접근하면 어디에서도 구제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흑인 내에서 주변화되고 여성 내에서도 주변화되면서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은폐되는 것이다. 크렌쇼는 인간이 다면적인 존재임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런 오류가 생긴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곳에서 사고가 났다면 원인을 쉽게 밝힐 수 있을까?(정말 멋진 표현이다.)

흑인 남성을 성범죄자로 보는 인종적 편견을 강화할까 두려워,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에 의한 성범죄 피해를 쉽게 공론화하지 못했다. 같은 여성이라도 인종에 따라 처한 상황은 달랐다.

힘은 여성으로서도 흑인으로서도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차별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

실제로 제주도 예멘 난민 500여명 중에는 45명의 여성이 있었다. 그러넫 전원이 남성이라는 생각이, 그렇게 믿고 싶은 듯 사실처럼 유통되었다. 예멘 여성의 존재는 지우려는 듯이 말이다. 여성의 안전을 외치는 한국사호에서 예멘 여성들의 자리는 없었다.

어렵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측면에서 약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러가지 이유로 중첩된 차별을 겪고있고, 그래서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더 차별을 받기도 한다.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고정관념은 무엇가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범죄자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극단적인 악인을 상상한다.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범죄자에 대한 과장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와 같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악랄하고 기괴한 모습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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